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집트 왕국 (문단 편집) === 자치 이후에서 독립 직전까지 === 독립은 실패했지만 [[이집트]]를 [[오스만 제국]] 내의 자치령으로 만들고 태수직 세습에도 성공하는 등 소기의 목적을 거의 달성한 [[메흐메드 알리]]는 이후로도 개혁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고, 1849년에 메흐메드 알리가 사망한 후에 즉위한 태수들 역시 개혁 정책을 지속했다. 문제는 제4대 태수이던 무하마드 사이드 파샤가 [[수에즈 운하]]의 건설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.[* [[수에즈 운하]]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, [[이집트/역사#s-1|고대 이집트 시대]]에도 이미 있었지만, 8세기 경에 군사적인 이유로 운하를 폐쇄하고 물길을 메우면서 운하가 없어져 버렸다. 현대의 운하는 이것을 재발굴한 것은 아니고 새로 파낸 물길로 되어있지만, 운하 건설 도중에 발굴된 [[수에즈 운하#s-3.1|고대 수에즈 운하]]는 운하 건설 당시에 일하던 일꾼들의 식수를 공급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.] 당시에 [[산업 혁명]]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로 인해 [[유럽]] 열강들 사이에서는 상품의 운송비를 절감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으며, 이에 따라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추진하고자 [[이집트]] 정부에게 공사를 제안했다. 당시 태수는 이 [[수에즈 운하]]가 군사적, 경제적으로 이집트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, 이에 따라 [[프랑스]]의 지원을 받아서 운하의 건설을 개시했다. 그리하여 제5대 태수인 [[이스마일 파샤]]의 치세이던 1869년에 [[수에즈 운하]]가 완공되었다. 하지만, 10년이나 걸린 공사로 인해 [[이집트]] 정부는 막대한 채무에 눌려 파산 직전에 몰렸고,[* 어처구니없게도 [[이스마일 파샤]]가 [[수에즈 운하]]의 개통을 축하하는 사치스러운 개통식을 치르면서 [[이집트]]가 더더욱 [[국가 막장 테크]]를 타게 되었다는 점이다. 참고로 이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여 [[이탈리아]]의 국민 작곡가인 [[주세페 베르디]]가 이스마일 파샤에게 헌정한 [[오페라]]가 바로 [[아이다(오페라)|아이다]]이다.] 이때문에 이집트의 국영 회사였던 [[수에즈 운하]]의 운영사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의 주식의 상당수를 [[영국]]에게 팔아버려야 했다.[* 당시 [[수에즈 운하]]의 운영사였던 [[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]]의 최대 주주는 [[이집트]] 정부와 [[프랑스]] 정부였다.] 이때부터 [[이집트]]는 영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고, 1922년에 [[오스만 제국]]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하기 직전까지 영국의 보호령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. 이런 상황은 [[이집트]]의 민족주의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, 이 시기에 오늘날까지 [[이집트인]]들의 국가적인 영웅으로 칭송받는 [[아라비 파샤]]가 등장하게 되었다. 일전에도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[[오스만 제국]]의 속령으로 간주되던 이집트를 완전히 독립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했던 그는 1882년에 [[영국]]이 [[이집트]]를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만들자,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. 동년 [[이집트]]의 군사 대신으로 임명된 후에는 [[영국]]이 군사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막고자 했고, 이를 위해 [[알렉산드리아(이집트)|알렉산드리아]]에서 일어난 반영(反英) 봉기를 후원했다. 그러나 이내 [[영국]] 정부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[[이집트]] 정부는 [[아라비 파샤]]를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압력에 시달렸고, 결국 아라비 파샤는 체포되어 [[사형]] 선고를 받았다가 이내 국외로 추방되는 조건으로 감형되었다.[* 나중에 [[아라비 파샤]]는 [[이집트]]로 귀국하긴 했으나, 돌아온 지 얼마 안된 1911년에 병으로 사망했으며, 끝내 [[이집트]]의 완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.] 이렇게 [[영국]]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된 [[이집트]]는 대신 [[영국]]으로부터 [[수단 공화국|수단]]의 공동 통치를 제안받았고,[* 근데 [[수단 공화국|수단]]은 [[메흐메드 알리]]의 치세에 이미 [[이집트]]에게 정복되어 이집트령이 된 지 오래였고, 여기서 수단 현지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선포하자 [[영국]]이 이를 진압하고 멋대로 자국령으로 선포한 상태였다. 남의 땅을 일방적으로 뺏은 셈이라서, 수단 지배의 근거를 만들고자 [[이집트]]와 공동 통치를 한 것이다. 참고로 당시의 수단 지역은 오늘날의 [[수단 공화국]]과 [[남수단]]을 모두 아우르는 지역이었다.] 이때 수단과 이집트 간의 국경선이 결정되었다가 1902년에 국경선이 재조정되었는데, 이 때문에 오늘날에 사실상 [[무주지]]가 되어버린 [[비르 타윌]]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.(...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